예술창작학부문예창작전공
2026-06-07 · 조회 0
한 장의 투표용지는 얼마나 무거운가
한 장의 투표용지는 얼마나 무거운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선언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문장은 결코 당연하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시민들의 참여와 희생, 저항과 연대를 통해 지켜져 온 민주주의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가장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선거는 단순히 대표자를 선출하는 절차가 아니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확인하는 과정이며, 자신의 의사를 사회와 정치에 반영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그렇기에 모든 유권자는 차별 없이 자신의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할 책임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2026년 6월 3일 실시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단순한 행정 착오로 치부될 수 없다. 투표용지는 선거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며, 국가가 국민의 참정권을 보장하겠다는 최소한의 약속이다. 따라서 투표소를 찾은 시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준비가 부족했다는 문제를 넘어 민주주의가 얼마나 충실하게 운영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은 국민이 직접 대표를 선출할 권리를 요구한 시민들의 투쟁이었다.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의 희생 끝에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행사하는 투표권 역시 그 노력 위에 세워졌다.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로 나선 이들이 원했던 것은 단순한 선거의 형식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의사가 동등하게 존중받는 것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이번 사태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이다. 민주주의는 선거를 실시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민이 자신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고 있다고 믿을 때 비로소 작동한다.
우리는 문예창작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다. 소설과 시, 수필은 결국 사람의 목소리에서 시작된다. 문학은 누군가의 말을 듣고 기록하는 일이며, 세상에 존재하지만 쉽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언어로 남기는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민주주의 역시 하나의 거대한 목소리의 체계라고 생각한다. 시민은 선거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말하고, 국가는 그 목소리를 정치에 반영한다. 문학이 사람의 말을 기록하는 작업이라면, 선거는 시민의 말을 기록하는 제도이다. 때문에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결과가 아니다. 누구의 목소리도 누락되지 않았다는 확신이다. 한 사람의 말이 지워지면 문학은 기록으로서의 의미를 잃는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 역시 그 정당성을 잃게 된다. 이번 사태를 우리가 가볍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투표용지 부족 문제는 단순히 행정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시민의 목소리를 얼마나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선거는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헌법적 절차이며,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떠받치는 기반이다. 따라서 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그 규모와 관계없이 철저하게 검토되어야 하며,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책임을 요구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원인을 규명하고, 국민에게 설명하며,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개선하는 과정이 있을 때 비로소 신뢰는 회복될 수 있다.
이에 숭실대학교 문예창작전공 학생회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첫째,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발생 원인과 대응 과정을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라.
국민은 어떠한 이유로 투표용지가 부족하게 되었는지, 현장에서 어떠한 조치가 이루어졌는지, 향후 어떤 재발 방지 대책이 마련되고 있는지 알 권리가 있다. 선거관리기관은 국민의 신뢰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기관인 만큼 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 책임을 다해야 한다.
둘째, 선거 운영 및 관리 체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라.
투표용지 수급 계획과 배부 체계, 현장 대응 매뉴얼 등 선거 운영 전반을 점검하고 보완하여 동일한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참정권은 상황에 따라 조정될 수 있는 행정 서비스가 아니라 국가가 반드시 보장해야 할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셋째, 향후 모든 선거에서 참정권 보장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아라.
어떠한 이유로도 유권자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편의보다 국민의 권리가 우선되어야 하며, 선거관리기관은 모든 국민이 동등하게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투표용지 한 장은 종이 한 장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생각이며, 한 사람의 목소리이며, 한 사람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록이다. 그리고 문학을 공부하는 우리는 그 기록이 어떠한 이유로도 누락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어떠한 시민도 자신의 목소리를 남기기 위해 기다리거나, 포기하거나, 돌아서지 않아도 되는 대한민국을 요구한다. 한 장의 투표용지는 얼마나 무거운가. 그 무게는 종이의 무게가 아니다. 한 사람의 목소리의 무게이며, 국민주권의 무게이며, 민주주의의 무게일 것이다.
2026. 6. 6.
숭실대학교 제28대 문예창작전공 학생회
이 성명서는 숭실대학교 · 본교 아카이브에 수집·검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