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보
연세대학교 철학과24학번이상준 성명서 원문 1연세대학교 철학과24학번이상준 성명서 원문 2연세대학교 철학과24학번이상준 성명서 원문 3
원문 3

연세대학교

철학과24학번이상준

2026-06-08 · 조회 0

피로 아로새긴 민주주의 위에서


피로 아로새긴 민주주의 위에서 나는 묻는다. 선관위는 답하라. - 국민 주권을 뒤흔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규탄한다 - 어제 2026년 6월 3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치러져야 할 선거는 민주주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주권자의 의사가 모여 공화국의 내일을 결정해야 할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하다는 우리 헌정사 유례없는 이유로 투표가 지연되고 중단되었다. 유권자는 기표소 앞이 아니라 대기열 앞에 멈춰 섰다.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하기도 했다. 투표용지는 단순한 종이 한 장이 아니다. 그것은 주권자의 의지가 기입되는 최소한의 자리이며, 국민이 통치의 대상이 아닌 정치 주체임을 입증하는 민주주의의 가장 구체적인 형식이다. 투표용지 부족은 행정청의 작은 착오가 아니다. 주권자의 권리를 담아낼 그릇조차 준비하지 못한 국가기관의 오만이자 파탄이며, 국민의 참정권을 예측과 비용의 언어 아래 가두어 버린 민주주의에 대한 모욕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이다. 선거관리는 단지 날짜에 맞춰 투표소를 열고 개표를 진행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모든 유권자가 동등한 조건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공적 절차 전 과정을 의미한다. 투표를 효율적으로 진행하는 일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한 것은 투표권을 남김없이 보장하는 일이다. 요컨대, 비용 절감보다 앞서는 것은 국민의 권리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 일이다. 이렇듯 자명한 원칙 앞에서 선관위는 이번 사태 앞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망각했다. 다시 한번 언급하건대, 예상을 넘어선 투표 참여는 절대 실패의 변명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직 건재함을 알리는 시민적 생명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선관위가 마땅히 경외해야 했던 것은 통계의 평균값이 아니라, 언제든 투표소를 찾을 수 있는 주권자의 가능성이었다. 국민의 참여를 부담으로 여기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빈약한 변명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더욱 참담한 것은 사태 이후의 태도다. 사과는 있었으나 구체적인 진상 규명은 없었다. 유감 표명은 있었으나 그에 따른 책임은 없었다. 투표용지 수의 산정 방식, 투표소별 배부 기준, 예비 물량 확보 여부, 긴급 이송 체계, 비상상황 대비 매뉴얼, 끝내 투표하지 못한 유권자의 규모, 이 질문들 앞에서 침묵하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늦추기 위한 공허한 의례에 불과하다. 진실은 이미 전진하고 있다. 그 발걸음은 공허한 사과문 한 장으로 멈출 수 없고, 책임자의 사의 표명만으로 가려지지 않으며, 정쟁의 소음 속에 묻힐 수 없다. 진실의 발걸음은 투표용지 산정표와 현장 보고서, 지휘 체계와 의사결정 과정, 발길을 돌려야 했던 유권자의 침묵 속으로 나아갈 것이다. 선관위가 해야 할 일은 그 발걸음을 막는 것이 아니라, 국민 앞에 스스로의 무능을 인정하고 실패의 전모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나는 자랑스러운 선봉 문대의 한 학생으로서, 이 사태를 결코 방관하지 않겠다. 문과대학 학생회칙은 우리 문과대학이 “비판과 저항이라는 인문학적 가치와 정신에 입각하여 부당한 억압에 대해 목소리를 내왔”다고 명시한다. 나는 이 문장을 회칙의 문구로만 남겨두지 않겠다. 오늘날 우리에게 대학이란 상아탑의 비겁한 도피처가 아니라, 불의를 직시하고 권력의 책임을 묻는 지성의 최전선이다. 민주적인 공간은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을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더하여, 연세의 이름은 민주주의의 기억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이 교정에는 이한열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선배들의 외침이 서려 있다. 그들은 국가폭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자신의 가장 푸른 시간을 내놓았다. 민주주의는 시대가 베풀어 준 안락의자도, 권력이 건네준 비단옷도 아닌, 해충과 비바람을 견디며 스스로 향기를 얻은 들판의 백합화처럼 투쟁 속에서 가까스로 피어난 역사였다. 그토록 어렵게 세운 민주주의가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무능한 행정 앞에서 흔들렸다. 나는 선배들의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물어야 한다. 선관위는 과연 부끄럽지 않은가. 윤동주 선배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그 부끄러움의 감각은 오늘 우리에게도 긴요하다. 국민의 한 표가 예측 실패의 잔여물처럼 취급되고 헌법기관이 자신의 독립성을 방어의 언어로 소비하는 작금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찌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지식인의 양심은 먼 곳의 관념이 아니다. 이는 권리가 훼손되는 순간 그 훼손을 정확히 인식하고, 또 명명하고, 나아가 책임을 묻는 일에서 출발한다. 분명히 해둘 것은, 나는 이번 사태를 특정 정당의 이해관계로 환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어느 후보가 이기고 어느 후보가 졌는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이 주권자로서 당연히 행사해야 할 권리가 국가기관의 무능과 안일함으로 인해 보장되지 못했다는 민주주의의 근간에 관한 문제이다. 선거관리기관의 실패를 묻는 일은 선거 결과를 흔드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선거제도에 대한 신뢰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참정권의 훼손을 묵인한 채 앞으로의 민주주의의 안녕을 말하는 것은 분명한 기만이다. 하여 나는 국민의 참정권 행사를 중대하게 제약하고 선거제도에 대한 신뢰를 훼손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강력히 규탄하며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하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의 산정·배부 기준부터 현장 대응 실태까지 전 과정을 낱낱이 공개하고, 즉각적인 전수조사를 실시하라. 하나. 노태악 위원장을 비롯한 선관위 지휘부는 무능에 대한 법적·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진상 조사와 국회 차원의 검증에 성실히 응하라. 하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참정권 침해에 대한 구체적인 재발 방지 계획을 제출하고, 예비 물량 확보 및 대응 매뉴얼의 전면적 제도화를 완수하라. 역사는 오늘을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물을 것이다. 오늘 대학은 무엇을 했는가. 인문학의 이름으로 비판과 저항을 말해온 우리는 무언가를 외면하지는 않았는가. 불의가 행정의 언어로 자신을 감추고, 무능이 관습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변호할 때, 대학은 침묵의 안온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나는 스러지는 민주주의를 바라만 보지 않을 것이다. 선배들의 피로 피운 꽃이 다시 불의 앞에서 짓밟히지 않도록, 끝까지 묻고 기록할 것이다. 그 부끄러움을 그저 감상이나 일시적 괴로움으로 유예하지 않을 것이다. 선관위의 무능을 치밀하게 추적하고 낱낱이 파헤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인이 읊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 응답하는 지성인의 실천이라고 하겠다. 나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이 자리에 섰다.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꽃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죽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훼손된 주권자의 권리가 다시는 무능의 그늘에 버려지지 않도록, 나는 기어이 묻고 또 물을 것이다. 밝아올 여명까지 함께 이 물음을 밀고 나아가자. 2026년 6월 4일 바야흐로 밝아올 여명의 내일을 교망하며 연세대학교 철학과 24학번 이 상 준

이 성명서는 연세대학교 · 본교 아카이브에 수집·검수되었습니다.